"한 시대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였던 것이 후손에 이르러 완전히 무의미해진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 유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
지난 금요일 퇴근길, 주유소 앞에 길게 늘어선 차량 행렬을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100년 후 사람들은, 우리가 매주 주유소에 들러 휘발유를 채우던 이 모습을 어떻게 볼까?"

어쩌면 우리가 지금 마차나 증기기관차를 보듯, 박물관 유리 너머의 풍경처럼 낯설게 바라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공학도로서 '당연한 기술'이라는 것이 얼마나 일시적인지 새삼 느꼈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에서 책 속 한 문장이 제 생각과 정확히 맞물렸습니다.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의미의 그물망이 생기고 풀리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다."
단순한 문장인데, 잘 이해가 안되더라구요. 그렇지만 곱씹어 보면서 앞 페이지로 돌아와 다시 한 번 읽어보았습니다.
1. 우리는 왜 '지금 이 믿음'이 전부라고 생각할까?
그리스 신은 허구다. 로마 제국의 영광도 이제는 박물관 유리 너머의 이야기다. 우리는 그것을 쉽게 인정합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믿는 것, 지금 내 사회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가 허구일 수 있다는 말에는 고개를 젓습니다.
왜일까요?
하라리는 말합니다. 그것이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라고. 교회에서 결혼하고, 선거일에 투표하고, 국기 앞에 경례하는 행동들. 이것들이 의미 있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주변의 모든 사람이 그것을 의미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서로의 믿음을 강화하며 자기영속적인 고리를 만듭니다. 그 고리가 촘촘할수록 의미의 그물망은 더 팽팽하게 펼쳐집니다.
그런데 몇십 년, 몇백 년이 지나면?
그물망은 풀립니다. 그리고 새로운 그물망이 만들어집니다.
2. 역사 공부는 '상대화'의 훈련이다
단순히 연도와 사건을 외우고 시험을 보는 그런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란건 다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과거를 알아야 현재와 미래를 알 수 있다라는 어딘가에서 들어본 그런 가르침이 떠오르게 되지요.
호모 데우스에서, 역사는 지금 내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낯설게 보는 능력을 기르는 과정이라고 소개합니다. 무슨 소리?
중세 유럽 사람들에게 왕권신수설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절대적 진리였습니다. 조선의 신분제는 '하늘이 정한 질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조금 더 가까운 예를 들어볼까요. 불과 100여 년 전, 사람들에게 '말(馬) 없이 거리를 달리는 쇠덩어리'는 위협적이고 부자연스러운 물건이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자동차가 그 시절엔 그랬습니다.
역사는 조용히 말합니다.
"지금 네가 믿는 것도, 몇백 년 후엔 그렇게 보일 수 있어."
이 불편한 진실을 직면하는 훈련. 그것이 역사 공부의 첫 번째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3. 역사 공부는 '공동의 이야기망'을 이해하는 일이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결정적 이유 중 하나는, 서로 알지 못하는 수백만 명이 공동의 이야기를 믿으며 협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화폐가 가치 있는 이유는 금이 뒷받침해서가 아닙니다. 모두가 그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술도 다르지 않습니다. '내연기관이 자동차의 표준'이라는 믿음, '운전은 사람이 직접 해야 한다'는 믿음, 이런 것들 역시 한 시대를 지탱하는 거대한 이야기망입니다.
역사를 공부하면 보입니다. 어떤 이야기가 어떻게 탄생하고, 어떻게 사람들을 묶고, 어떤 계기로 무너지는지. 이 패턴을 이해하는 사람은 현재를 훨씬 깊이 읽을 수 있습니다.
뉴스 너머를 보는 눈. 그것이 역사가 주는 두 번째 선물입니다.
4. 역사 공부는 결국 '겸손'을 배우는 일이다
역사를 깊이 공부한 사람일수록, 오히려 확신이 줄어드는 경험을 한다고 합니다.
수천 년 인류의 이야기를 보면, 어떤 절대적 진리도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강력했던 제국도, 가장 신성시되었던 믿음도, 시간 앞에서는 결국 풀려버렸습니다.
이것은 허무주의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순간, 내가 속한 이 공동체의 이야기를 더 소중히 가꾸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이어집니다. 그물망은 저절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함께 짜야 합니다.
마무리하며: 100년 후, 우리의 주유소는 어떻게 보일까
하라리는 말합니다.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의미의 그물망이 생기고 풀리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라고.
그 말이 이제는 이렇게 들립니다.
역사는 과거를 가르치지 않는다. 현재를 읽는 법, 그리고 미래를 겸손하게 대하는 법을 가르친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매주 주유소에 들러 화석연료를 태우는 일. 운전대를 직접 잡고 신호와 차선을 일일이 살피는 일. 차고에 내연기관 차량을 세워두고 정기적으로 오일을 갈아주는 일.
지금은 너무도 당연한 풍경입니다. 하지만 100년 후 누군가는 우리를 보며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왜 저 사람들은 저렇게 위험하고 비효율적인 방식을 그토록 오래 고집했을까?"
물론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100년 후 사람들이 "그래도 그 시절엔 운전의 낭만이라는 게 있었지"라고 회상할 수도 있겠지요. 어느 쪽이든 분명한 것은, 지금 우리가 굳게 믿는 자동차와 에너지의 그물망도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내가 굳게 믿는 이것. 100년 후 누군가는 어떻게 볼까요?
이 질문은 오늘도 유효합니다.
【참고 자료】
유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 (Homo Deus: A Brief History of Tomorr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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